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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음작은도서관

석도익 컬럼<홍천의 민족정신>

원로들이 전하는 홍천의 민족정신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석도익

 

이는 일본의 강점과 식민정책에 항거하며 자주독립을 쟁취하기위해 대한독립을 선언한 1919년 3.1 기미독립선언문의 첫 부분이다.

 

한일 병합 조약(韓日倂合條約)은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되어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일방적인 위력에 의해 이루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한일 합방 조약(韓日合邦条約)이라고도 불린다.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는 이를 국권피탈(國權被奪), 경술국치(庚戌國恥) 등으로 호칭한다.

 

이로서 우리나라대한제국은 없어지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식민으로 살아야 했던 민족이 떨쳐 일어나 대한독립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고 항일운동에 서막을 울린 3.1기미독립만세운동이야 말로 민족정신의 발로이며 그 민족정기를 후세에 면면히 전하는 메시지인 것이었다.

 

올해가 민족정신에 횃불을 지피고 함성을 울 린지 100년이 되는 해다. 100년 전 목숨을 아끼지 않은 독립 운동가들의 외침 덕분에 우리민족의 나라가 세워졌고 역사는 다시 이어졌다.

 

선열이 생명을 바쳐 지킨 이 땅에서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인데도 우리들 기억 속에 많은 독립운동가분들이 점점 잊혀 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홍천군관내 3.1만세 운동은 1919년 4월 1일 홍천읍에서 차봉철, 서상우, 오창섭 의사를 비롯해, 홍천읍·북방면 농민 300여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였고,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북방면의 신여균, 전원봉, 최승혁, 한용섭, 김복동 등 다섯 분의 의사가 옥고를 치룬 후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1919년 4월 2일 동면에서는 민병소, 민병태 의사가 주민 천여명과 더불어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다 일본군에 의하여 희생되었으며, 전국에서도 유일하게 장날도 아닌 4월 3일 내촌면 동창마을에서도 김덕원 장두가 동학교도조직을 이용한 거사통문으로 화촌면, 내촌면, 서석면 내면과 인제군 기린면 등 2개 군 5개면 주민 3천 여 명이 동창들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이순극, 전영균, 이기선, 연의진, 김자희, 전기홍, 양도준, 이려선 등 8열사는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김덕원 의사는 주모자로 수배 중 체포 수감되어 혹독한 형벌에 두 눈이 실명되어 출옥되었으나 그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우리고장 선열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고자 목숨을 바쳤듯이, 자랑스러운 홍천의 역사를 지키며 풍요를 일구어낸 지금의 원로회 어르신들이 그날의 민족정신을 후세에 새겨주고자 뜻을 함께하고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민족정신의 근본을 이룬 3.1기미독립만세운동의 독립선언문을 비로 새겨서 민족정기의 샘이 되게 하고자 기미독립만세운동 100년을 되돌아보며, 군민의 발걸음 잦은 터에 세움은, 널리 군민의 자손만대 가슴에 길이 전하고자 함이란다.

 

홍천정명 1,000년을 딛고 다시 웅비하는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충정의 고장, 넓은 내 홍천강이 400리를 유유히 흘러가 한강을 이루어주는 홍천에는 어르신의 경험으로 터득한 지혜와 올곧은 젊은이의 힘과 용기와, 아이의 아름다운 꿈과 희망이 함께하여 행복한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 행복이 홍천군에 힘으로 모아지고, 그 힘은 민족정신에 뿌리가 되게 하니 내 고장 홍천의 미래와 우리나라 대한민국 역사는 창대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