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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음작은도서관

동동산 애국혼(석도익)

동동산에 애국혼

소설가 석 도 익

 

 

큰 용에 기상이라는 대룡산위에 안개는 천수(天水) 되어 방울방울 모이고 골골이 합쳐져서 성동천을 이루고 홍천의 넓은 내에 몸을 섞는다.
육탄 살신성인 강재구 소령이 산화한 강재구공원을 지나면 구절산 성골을 가로막은 대룡저수지 거대한 둑을 바라보며 성동천을 끼고 대룡산 길을 조금 더 가다보면 오른쪽 산자락 휘감아 돌아가는 물굽이 5미터 바위벼랑이 시린 물에 발 담그고 있는 300여평 남짓한 밭 가운데 남아있는 동산이 바라보인다.
예전에 이곳 산자락에는 산돌조각들이 많이 쌓여있는 곳을 돌아가는 길이라. 하여 지명이 돌모로인 이곳에는 내를 중심으로 농지지대인 안마을과 산자락 마을이 포실하게 촌락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은 초가지붕에서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을 뿐 크게 변한 건 없어 보인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이곳에 살던 신여균(당시21세)청년이 조국에 국운을 한탄하며 아침마다 매일같이 동산에 올라가서 발을 동동구루며 독립만세를 불렀던 곳이며 뜻을 같이하는 전원봉(성동리) 김복동(능평리) 최승혁(하화계리) 한용섭(하화계리) 동지들과 자주모여 만세를 함께 부렸다 한다.

 

당시 홍천은 횡성과 더불어 강원도 내에서는 드물게 천도교도와 기독교가 공동으로 만세운동을 추진한 지역이다.
선두에서 추진한 천도교인 오창섭(吳昌燮)과 감리교인 차봉철(車奉哲) 서상우(徐相佑) 인데 이들은 고종인산에 참배 갔다가 서울에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후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감리교회는 읍내주민을 천도교회는 북방면 주민들에게 이를 계몽시키면서 홍천읍 장날인 1919년 4월 1일을 만세운동 날짜로 정하고 일제 봉기하기로 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면서 태극기를 만들고 교인을 통해 민중계몽과 동원준비를 갖추었다. 또 오창섭(吳昌燮)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회에서는 같은 마을의 교인인 김영옥(金永玉)과 노동근(盧東根)이 힘을합해 북방면을 중심으로 하여 계획을 추진했다.
북방면도 지도자인 성동리의 신여균(申與均) 김원봉(金原鳳)과 하화계리 최승혁(崔承赫)이 합세하여 추진해 나갔다. 업무도 분담하여 기독교도들은 손 태극기를 만들고 천도교인들은 큰 태극기를 만들었다.
매일같이 동동산에 모여 만세를 부르며 앞이 안 보이는 나라 잃은 난민으로 한탄만 하던 이들에게는 속에 응어리진 한을 함성으로라도 토해낼 기회라 생각했던 것이다.
예정된 홍천읍 장날인 4월 1일 홍천읍과 북방면 주민들은 장터로 몰려들었다. 북방면 화동리 능평리 상화계리 중화계리 하화계리 농민은 때마침 홍천 인제간 도로 공사장에서 부역인부로 대기하고 있었다가 장터로 달려가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천도교인이 만든 대형 태극기가 시장안에 높이 솟았고 기독교인이 준비한 손 태극기가 군중에게 나누어지고 주동자들이 앞장서서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청으로 몰려가니 수는 장마 물 같이 불어나서 그 수가 오백여명이 넘었다 한다.
당시 김동훈(金東勳) 군수는 혼비백산하여 행방을 감추고 홍천면장 임준철(林準轍)도 도망가 버렸다, 일제 관리는 만세소리가 진동하는 군중들의 위세에 눌려 우왕좌왕 했다.
특히 북방면에서 도로 공사장에 부역인부로 나왔던 사람들은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듣고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읍내로 들어가 군중과 합류하여 숨어있던 김군수를 찾아내서 그가 차고 있던 칼을 꺾고 팔을 비틀어서 끝내 오만한 군수를 무릎 꿇게 했다.
오후가 되자 춘천에서 헌병대와 수비대 병력이 도착했다. 증원군은 홍천헌병대와 합세하여 주동자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체포된 인원은 일본 측 기록에 33명이라고는 하나 일제검거선풍에 걸려든 사람들은 이보다 몇 배 더 많았을 것이며 이들은 갖은 고문과 고초를 겪었다.
내 나라를 독립시켜달라는 시위운동이 치안을 방해했다는 죄명으로 1년 6개월에서 3개월 징역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살며 갖은 고문과 형벌로 만신창이가 되어 출옥 후에도 그 여독으로 괴로운 일생을 보내야만 했다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답답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던 대한독립만세! 그 소리가 지금도 저 동동산에서 들리는 듯하다.

 

지금은 벼랑 뒤쪽으로는 밭이 되어 있어 산이라고 할 수 없는 귀때기 동산에 불과하지만 일제치하에서 숨은 가슴을 열고 소리 지르며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들을 늘 보아왔던 주민들은 어느 결엔가 이곳을 동동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동산 위쪽으로 바라보이는 교각이 서울 양양을 잇는 동서고속도로의 거대한 교각이 보이듯이 그들이 그렇게 발을 동동구루며 열망했던 조국해방이 이루어지고 이제는 세계열강과 어깨를 견주는 선진반열에 올라있는데 이 역사의 터는 잡초와 잡목으로 덮여 숭고한 뜻마저 잊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이곳에 잠시 살았던 난궁경 옹이 이 사실을 주민들에게 전해 듣고서 들추어 고증하고 지역민들의 구전을 토대로 옛 기록을 찾아내서 이를 근거로 이곳 동동산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지역민들과 힘을 합하여 자연석에 비를 새겨 199441일 세우게 되었다.

 

“기미 1919년 홍천4.1운동 앞장서신 김복동 신여균 전윤복 최승혁 한용석님은 피나는 눈물 애타는 절규의 기도로 새벽마다 독립을 개원하사 발을 동동구르며 기도하시니 이름하여 동동산이 되었네” 음각으로 새겨진 이글은 퇴색되어 알아보기 힘들다.